코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현장예배를 고수하는 많은 교회를 보게된다.
여기서 또 궁금증이 폭발한다.
그들은 뭐라고 하면서 현장예배를 주장할까?
크게 2가지 주장으로 압축되는 것 같다.
1)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예배이다.
그럼 당연히 예배의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도대체 예배라는 것은 무엇인지?
여기저기 검색해 보니 사전적 의미는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리는 것이
예배적 의미이고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 보면
진정한 예배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를 보게 된다.
진정한 예배의 정의는 대부분의 검색에서는 신령과 진정이란 단어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 행위를 위해서는 시공간을 뛰어넘음을 의미한다.
교회에서의 경배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모든 공간에서 드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안에 가두어 좁은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창조주의 하나님을 선포하기에
굳이 교회안으로 한정하지 않고 민족을 뛰어넘은 예배를 의미한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대화에서도 예배의 장소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유대인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만을 고수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의 4장의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념처럼 떠 받쳐던 예루살렘의 예배를 허물고 계신다.
장소가 그렇게 중요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이때"라는 시간에 초점을 두고
"신령과진정"이라는 자세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도 꼭 교회에서만 예배드려야 하는가?
다음을 가정하며 이런 자들에게 묻고 싶다.
전쟁중이라고 하자. 1000명의 무리와 함께 산길을 헤치며 피난길에 올랐다.
산턱 중간에 적들이 있기에 침묵을 유지하며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
피난중에 일요일 11시가 되었다. 피난민 중에 50명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있다.
일요일 11시이니 우리의 예식대로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려야겠다며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적들에게 들켜 나머지 950명도 같이 몰살당했다.
이런 극단적 예를 제시하였음에도 그 상황이라도 예배를 드리겠다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제로 많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이 상황에서도 예배를 드릴려고 할 것이다.
옆에 죄없는 나머지 950명이 죽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그런 예배를 기뻐할까?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기 위해서 50명이 목숨바쳐서 예배 드렸고
그 중에서 나머지 950명도 같이 목숨을 바치게 만든 그 예배..
그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인지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봤으면 한다.
2) 왜 교회만 문 닫아야 하는가?
이 주장을 하면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흔히 좌파세력의 기독교 죽이기이다.
공산주의 세력들이 득세하면서 유독 교회에 대해서만 바이러스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임시적으로 문을 닫게 한 후에 장기적인 계략으로 북한이나 중국처럼 모든 교회 문을 닫게 만든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더 논의하기 위해서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필요하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고 교회 구성원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
교회 역할은 사랑을 하고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딱 2가지이다.
여러 책들에서 교회의 역할을 3가지로 혹은 10가지 나누어 설명하지만 2가지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일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그 예배에 관한 것은 첫번째 주제에서 논의하였기에 넘어가자.
두번째 이웃사랑의 관점에서만 보자.
백화점도 식당도 문열고 영업하는데 왜 우리만 닫아야 하나?
그 항변에는 영업적인 측면에서는 동의하지만 이웃사랑의 관점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교회는 장사하고 영업하는 곳이 아니고 대중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곳이다.
그리스도가 누군인지를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는 곳이다.
선교 초기에 왜 대중들은 그리스도를 주라 받아 들였을까?
논리적인 연결이 아니라 감성적인 연결이었다.
감성이 아니라 어쩌면 감동적인 연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지 모르겠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면 당황하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까?
왜 나에게 이런 혜택을 베푸는지..
그게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어찌 궁금하지 않으랴..
이런 교회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왜 우리만 문 닫아야 하는가라고 천박하게 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내의 집단 감염이 생기면..
교회 모든 사람들이 다 자살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웃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감동이 아니라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또 예배를 거론하지 말기를 바란다. 첫번째 주제에서 이미 논했기에..
교회는 백화점도 식당도 아니고 거대한 비지니스를 행하는 대기업도 아니다.
거저 섬기고 바보같이 퍼 주는 곳이다.
제발 교회가 피해자인냥 코스프레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다가 핍박받는 것은 핍박이 아니라 인과응보이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더 나아가 섬김의 자리까지 이르렀지만
예배만으로 미움을 받을때가 핍박일 것이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공감하기 어려운데 어느 누가 공감하랴?
보수 기독교 신문에서는 연일 코르나에도 왜 예배를 강행해야 하는지를 논설로 싣고 있다.
다소 현학적인 보이는 해석부터 짧은 주장까지..
마지막으로 변호인 영화에서 송강호의 이 대사가 떠 오른다.
"니는 니가 애국자 같나? 천만에 니는 죄없고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이다"
나에게 적용하자. 현상과 해석에 대한 통찰을 더 주의깊게 바라보자.
잘못된 신념으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났을때
애국자가 아니라 버러지의 삶을 살아왔다는 비극을 맞지 않기 위해서.
여자 약사의 동성애 강의를 듣고.
저희 교회에 여자 약사가 와서 동성애 강의를 했습니다.
듣고 정리만 해 두었다가 이제야 올리게 되네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주제이네요.
- 동성애 특강을 듣고 -
어제 동성애 강의를 듣고 우려스러운 점들이 있어서 글 올립니다.
저는 동성애자도 아니고 오히려 혐오스럽기도 한 입장입니다.
이런 글을 적는다는 것이 부담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서 적어 봅니다.
1) 기독교의 핵심원리인 사랑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강사가 동성애자를 만나서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할려고 한 흔적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나면 동성애를 혐오하게 되고,
예방차원에서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있겠죠.
하지만 그 중에 동성애자가 있고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가족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설교가 도움이 될까요?
동성애가 아니라 창녀에 대해서 관점을 옮겨봅시다.
죄됨을 강조하고 이슈화하면 과연 그 창녀가
교회로 올 수 있을까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몸을 팔게 되었는지? 그도 이 일을 즐길까?
현상만을 놓고 죄라고 단정짓고 강조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의 입장에서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돈하는 설명.
인과관계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설명하고 상관관계를 마치 인과관계처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강사왈 : "동성애를 받아들이면 교세가 확줄어든다. 선진국이 그렇다"라고
했는데 교세가 줄어든 이유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관이 바뀌어서 그럴 수도 있고 교회자체가 타락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할때는 근거와 검증의 자료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은 채 설명하는 것은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또한 동성애 다음에 수간이다?
(물론 큰 맥락은 차별금지법이었지만..)
그것 또한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명해야 하는데 그냥 전제조건처럼
애기해 버렸습니다.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소세지를 먹었더니 배가 아팠다. 소세지는
나쁘니까 먹지마라. 사실은 소세지에 핀 곰팜이가 원인이었는데
단순히 소세지를 먹었더니 배가 아프니까 먹지마라???
적어도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서 진짜 그런가를 되뇌이며
검증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도 있어야 하는데...
현상에 대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엮어서 설명해 버렸습니다.
3) 논리적인 비약이 심했습니다.
예를 들면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면
강사왈 : "회사원과 고등학생이 항문성교내용이 방송에 나와도 항의를 못한다"
라고 들었는데 정말 그럴까요?
동성애를 떠나서 현재 상식으로도 여고생과 회사원이 질삽입 성교내용이
방송에 나와도 무방한가요?
물론 강사가 동성애 대한 혐오를 표현하기 위해서 노골적인 하나의 예이겠죠.
하고 싶은 말은 동성애 관련방송이 나올 것이다라는 맥락이지만 그 예가 적절하지
않았기에 나도 노골적인 예로 대응했습니다.
강사왈 : "선진국의 목사들이 차별금지법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라고 예를 들었는데
그 비율이 얼마이며 제가 알고 있기로는 대부분의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상식선에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소당하는 것도 아주 심하게 인격적인
모독을 했거나 아니면 동성애를 적극 옹호하는 사람 중 한명이 걸고 넘어졌거나
그렇게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또한 미국 교계의 주류(쭉정이라고 표현하더군요)가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 주례를 반대한 목사는 잘려나갔다라고 표현하던데.. 그것도 제 상식 밖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알기로는 대부분 주류세력은 아직도 동성애에 대해서 이해는 하지만
부정적인 입장이고 비주류 세력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옹호론자들입니다.
그냥 생각들을 막 적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적는 이유는 이런 기독교가 너무 싫습니다.
언젠가 천주교에 대해서 신랄하게 까는 설교을 듣었습니다.
그게 제가 아는 천주교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후 세월이 흘러 회사에서 천주교 신자와 얘기를 했는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너무 무식했더군요.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한데 기독교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이고
동성애를 막아야 되겠다고 판단하면 너무나 무분별하게 정보를 아무 검증없이
살포해서 사회로부터 또 비난을 받습니다.
끝으로 제쪽에서 바라보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입니다.
모든 동성애에 대해서 죄라고 하기 보다는
나누어서 생각했으면 합니다.
성적타락에 의해서 동성애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말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근거는 동물들도 동성애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 동성애를 하면
화형을 시켰음에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지만 그 무언가는 있다라고 봐야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다르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동성애에 대해 어느 정도 포용하다 보면 성적자기결정권이니 동성결혼까지 이르게 되면서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사람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므로 저도 우려가 됩니다.
그래도 어제와 같은 식의 강의는 더 위험하다란 생각에서 적어 보았습니다.
듣고 정리만 해 두었다가 이제야 올리게 되네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주제이네요.
- 동성애 특강을 듣고 -
어제 동성애 강의를 듣고 우려스러운 점들이 있어서 글 올립니다.
저는 동성애자도 아니고 오히려 혐오스럽기도 한 입장입니다.
이런 글을 적는다는 것이 부담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서 적어 봅니다.
1) 기독교의 핵심원리인 사랑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강사가 동성애자를 만나서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할려고 한 흔적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나면 동성애를 혐오하게 되고,
예방차원에서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있겠죠.
하지만 그 중에 동성애자가 있고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가족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설교가 도움이 될까요?
동성애가 아니라 창녀에 대해서 관점을 옮겨봅시다.
죄됨을 강조하고 이슈화하면 과연 그 창녀가
교회로 올 수 있을까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몸을 팔게 되었는지? 그도 이 일을 즐길까?
현상만을 놓고 죄라고 단정짓고 강조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의 입장에서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돈하는 설명.
인과관계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설명하고 상관관계를 마치 인과관계처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강사왈 : "동성애를 받아들이면 교세가 확줄어든다. 선진국이 그렇다"라고
했는데 교세가 줄어든 이유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관이 바뀌어서 그럴 수도 있고 교회자체가 타락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할때는 근거와 검증의 자료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은 채 설명하는 것은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또한 동성애 다음에 수간이다?
(물론 큰 맥락은 차별금지법이었지만..)
그것 또한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명해야 하는데 그냥 전제조건처럼
애기해 버렸습니다.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소세지를 먹었더니 배가 아팠다. 소세지는
나쁘니까 먹지마라. 사실은 소세지에 핀 곰팜이가 원인이었는데
단순히 소세지를 먹었더니 배가 아프니까 먹지마라???
적어도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서 진짜 그런가를 되뇌이며
검증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도 있어야 하는데...
현상에 대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엮어서 설명해 버렸습니다.
3) 논리적인 비약이 심했습니다.
예를 들면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면
강사왈 : "회사원과 고등학생이 항문성교내용이 방송에 나와도 항의를 못한다"
라고 들었는데 정말 그럴까요?
동성애를 떠나서 현재 상식으로도 여고생과 회사원이 질삽입 성교내용이
방송에 나와도 무방한가요?
물론 강사가 동성애 대한 혐오를 표현하기 위해서 노골적인 하나의 예이겠죠.
하고 싶은 말은 동성애 관련방송이 나올 것이다라는 맥락이지만 그 예가 적절하지
않았기에 나도 노골적인 예로 대응했습니다.
강사왈 : "선진국의 목사들이 차별금지법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라고 예를 들었는데
그 비율이 얼마이며 제가 알고 있기로는 대부분의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상식선에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소당하는 것도 아주 심하게 인격적인
모독을 했거나 아니면 동성애를 적극 옹호하는 사람 중 한명이 걸고 넘어졌거나
그렇게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또한 미국 교계의 주류(쭉정이라고 표현하더군요)가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 주례를 반대한 목사는 잘려나갔다라고 표현하던데.. 그것도 제 상식 밖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알기로는 대부분 주류세력은 아직도 동성애에 대해서 이해는 하지만
부정적인 입장이고 비주류 세력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옹호론자들입니다.
그냥 생각들을 막 적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적는 이유는 이런 기독교가 너무 싫습니다.
언젠가 천주교에 대해서 신랄하게 까는 설교을 듣었습니다.
그게 제가 아는 천주교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후 세월이 흘러 회사에서 천주교 신자와 얘기를 했는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너무 무식했더군요.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한데 기독교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이고
동성애를 막아야 되겠다고 판단하면 너무나 무분별하게 정보를 아무 검증없이
살포해서 사회로부터 또 비난을 받습니다.
끝으로 제쪽에서 바라보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입니다.
모든 동성애에 대해서 죄라고 하기 보다는
나누어서 생각했으면 합니다.
성적타락에 의해서 동성애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말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근거는 동물들도 동성애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 동성애를 하면
화형을 시켰음에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지만 그 무언가는 있다라고 봐야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다르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동성애에 대해 어느 정도 포용하다 보면 성적자기결정권이니 동성결혼까지 이르게 되면서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사람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므로 저도 우려가 됩니다.
그래도 어제와 같은 식의 강의는 더 위험하다란 생각에서 적어 보았습니다.
교회를 옮기는 이유
떠날때는 조용히 떠나야 하는데..
이런 항변으로 조그만한 돌이라도 던져 놓으면
그 작은 물결이 생각의 자리로 이끌어 내지 않을까 하여
글을 적습니다.
사실은 작년에 떠날까 고민하다가 1년을 더 기도하면서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독교인이 사회에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몇 권의 책도 읽어보고 사복음서 중심으로 정독도 해 보았습니다.
그럴수록 괴리감은 커져갔습니다.
내가 교회를 개혁하는 주체자가 되자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나의 성향이나 나의 그릇으로 그러지 못함을 잘 압니다.
동참은 할 수 있을련지 모르지만 내가 앞장서서 나가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개혁을 일으킬만큼 윤리적으로 깨끗하지도 못하고
그런 개혁을 일으킬만큼 열정적이지도 못하고
그것을 감당할만큼 그런 사명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의 개혁이란 말이 아닌 삶이 뒷받침될때 파급력도 있고
영향력을 가지며 이루어지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끊임없이 내면을 괴롭히는 주제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제대로 가고 있고 그 안에 속해 있는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너무나도 정교분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권력이랑 분리되어야 하는데 의미가 변질되어 버려서
말그대로 정치와 분리해 버렸습니다.
설교가 우리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듯이
정치 또한 그런 문제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교회는 종북과 죄의 프레임에 갇혀서 더 우선순위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가끔씩 기독교 환자라는 느낌도 듭니다.
일제시대의 기독교와 군사정권이후의 기독교는 너무 다릅니다.
행동하는 복음이었는데.. 군사정권시절부터는 미국의 관계개선에
이용되어지는 기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교분리.
신앙인은 데모하면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오늘날의 이신칭의와 같은 논쟁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라는 훌륭한 제도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주권을 국민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너희에게 허락되었으니 잘 운영하라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너희가 일하라고.
그런데 교회는 기도만 하고 있고
교회안의 행사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할려면 기도뿐 아니라 공부를 해야하는데...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는 심각한 문제에도 침묵하고
세월호로 억울하게 죽은 학생들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침목하고
지금의 박근혜게이트가 터져나와도 그렇게 지원해 준 목사들의 회개없이
밑도 끝도 없이 우리의 죄때문이라며 회개기도를 촉구하면서 본질을 흐려 버립니다.
본질을 잡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묵상하면 할수록
지금의 교회의 형태와는 이질감이 더욱 느껴집니다.
아마 한국교회는 동성애와 이슬람 문제를 약속해 주면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가치인 작은 자에 대한 정책이 후퇴해도
그 후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묻지도 않고 트럼프와 같은 그런 후보를 지지할 것입니다.
죄의 세력이라는 프레임에 넣기만 하면 모든 공식이 성립되어
기독교의 지지를 쉽게 얻고 기독교를 이용합니다.
설교와 정치에 대한 비판이나 독서를 통한 토론문화가 생겨나지 않으면
언론이 만들어 낸 그 프레임의 늪에서 허우적 될 것입니다.
지금의 ㅇㅇ교회는 개인의 영성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만족하지만
위에서 서술한 문제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곳으로 떠남으로 답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소극적이며 이기적인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제 의견을 곡해할까봐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이 글은 저처럼 교회를 떠나라는 의도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하는 의도입니다.
정치와 교회는 분리될 수 있는지를..
각자 있는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했으면 하는
의도입니다.
섬기는 교회는 달라도
종국에는 다같이 칭찬받는 주의 백성이길 기도합니다.
이런 항변으로 조그만한 돌이라도 던져 놓으면
그 작은 물결이 생각의 자리로 이끌어 내지 않을까 하여
글을 적습니다.
사실은 작년에 떠날까 고민하다가 1년을 더 기도하면서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독교인이 사회에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몇 권의 책도 읽어보고 사복음서 중심으로 정독도 해 보았습니다.
그럴수록 괴리감은 커져갔습니다.
내가 교회를 개혁하는 주체자가 되자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나의 성향이나 나의 그릇으로 그러지 못함을 잘 압니다.
동참은 할 수 있을련지 모르지만 내가 앞장서서 나가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개혁을 일으킬만큼 윤리적으로 깨끗하지도 못하고
그런 개혁을 일으킬만큼 열정적이지도 못하고
그것을 감당할만큼 그런 사명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의 개혁이란 말이 아닌 삶이 뒷받침될때 파급력도 있고
영향력을 가지며 이루어지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끊임없이 내면을 괴롭히는 주제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제대로 가고 있고 그 안에 속해 있는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너무나도 정교분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권력이랑 분리되어야 하는데 의미가 변질되어 버려서
말그대로 정치와 분리해 버렸습니다.
설교가 우리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듯이
정치 또한 그런 문제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교회는 종북과 죄의 프레임에 갇혀서 더 우선순위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가끔씩 기독교 환자라는 느낌도 듭니다.
일제시대의 기독교와 군사정권이후의 기독교는 너무 다릅니다.
행동하는 복음이었는데.. 군사정권시절부터는 미국의 관계개선에
이용되어지는 기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교분리.
신앙인은 데모하면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오늘날의 이신칭의와 같은 논쟁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라는 훌륭한 제도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주권을 국민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너희에게 허락되었으니 잘 운영하라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너희가 일하라고.
그런데 교회는 기도만 하고 있고
교회안의 행사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할려면 기도뿐 아니라 공부를 해야하는데...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는 심각한 문제에도 침묵하고
세월호로 억울하게 죽은 학생들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침목하고
지금의 박근혜게이트가 터져나와도 그렇게 지원해 준 목사들의 회개없이
밑도 끝도 없이 우리의 죄때문이라며 회개기도를 촉구하면서 본질을 흐려 버립니다.
본질을 잡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묵상하면 할수록
지금의 교회의 형태와는 이질감이 더욱 느껴집니다.
아마 한국교회는 동성애와 이슬람 문제를 약속해 주면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가치인 작은 자에 대한 정책이 후퇴해도
그 후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묻지도 않고 트럼프와 같은 그런 후보를 지지할 것입니다.
죄의 세력이라는 프레임에 넣기만 하면 모든 공식이 성립되어
기독교의 지지를 쉽게 얻고 기독교를 이용합니다.
설교와 정치에 대한 비판이나 독서를 통한 토론문화가 생겨나지 않으면
언론이 만들어 낸 그 프레임의 늪에서 허우적 될 것입니다.
지금의 ㅇㅇ교회는 개인의 영성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만족하지만
위에서 서술한 문제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곳으로 떠남으로 답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소극적이며 이기적인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제 의견을 곡해할까봐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이 글은 저처럼 교회를 떠나라는 의도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하는 의도입니다.
정치와 교회는 분리될 수 있는지를..
각자 있는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했으면 하는
의도입니다.
섬기는 교회는 달라도
종국에는 다같이 칭찬받는 주의 백성이길 기도합니다.
내가 유신론자인 이유
나는 프로그래머이다.
프로그램 언어의 역사는 기계어로부터 시작되어 저급언어, 고급언어에서 오늘날의 객체지향언어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프로그램 언어들이 점차적으로 발전한 이유는 프로그래머의 같은 물음에서 시작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동일한 작업을 추상화해서 다음에도 최소한의 변경만으로 재활용할까라는
문제였다.
그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프로그램의 언어와 작성기법들이 발전해 나가고
그 고민의 흔적들에 의해서 패턴이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
그런 패턴들의 조합으로 계속해서 창조적이고 효율적인 작업이 이루어진다.
패턴의 조합에 의해 새로 창조된 패턴이 만들어 지고 그 창조된 패턴들의 조합으로
또 다른 창조된 패턴들이 무한루프속에서 계속 뭔가를 생산해 낸다.
처음 한가지 씨앗을 뿌리게 되면 그 씨앗을 중심으로 무한히 반복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이 시나리오...
이런 패턴의 흔적들이 있다면 나는 설계자가 있다고 믿는다.
엔지니어라면 공감할 것이다.
설계의 효율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패턴들이 만들어 질 수 밖에 없음을.
그럼 반대로 어떠한 패턴도 발견할 수 없다면 지적설계도 없는 것일까?
벽에 페인트를 뿌려보라. 일정한 패턴이 있는지를..
계속해서 바뀐다. 수백만번을 반복하면 토기 모양이 나타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뚜렷한 패턴이 없다. 패턴의 관점에서 보면 흩어진 페인트에서는 뽑아 낼 수 있는 그런 속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이란 그런 것이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패턴의 흔적을 찾아보자.
먼저, 창조의 가장 기초가 되는 우주을 보자.
우주에는 수많은 패턴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핵력,중력,전자기력과 입자의 조합으로 모든 것이 창조되어졌다.
우주의 은하도 무거운 물질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은하의 구성요소들이 돌아가고
은하의 하나인 태양계도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움직이며
물질의 작은 단위인 원자를 보아도 핵을 중심으로 전자들이 돌아간다.
물질의 구성이 뭔가 하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기본 패턴이다.
그 패턴을 가지고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가장 큰 우주까지 구성되어 있다.
자연속에 존재하는 패턴은 또 어떨까?
카오스이론에 나오는 몇가지 예를 보자.
나뭇잎을 관찰하면 5배의 배율로 보면 A라는 모양이 나타나다가 20배로 보면 없어졌다가
50배로 보면 또 A라는 모양이 발견되었다가 200배로 보면 또 없어졌다가..
비슷한 패턴이 확대하면 할수록 반복해서 보인다.
망델브로의 프랙탈 해안도
인공위성에서 보면 꾸불꾸불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내려와서 보면 구부러진 면이 실상은 직선에 가깝게 보이고
또 조금 더 내려와서 보면 직선이 아니라 울퉁불퉁해 보이고
다시 조금 더 내려와서 보면 다시 직선처럼 보이고...
생명체의 번성과 감소에서도 불규칙적인 것 같지만 패턴적인 입장에서는 규칙적이며 안정적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우연의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은 다양한 패턴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자연선택에 의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자연은 열역학의 법칙들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법칙들은 왜 그렇게 일어나야만 하는지를 물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수학의 공리처럼 취급한다.
전기력과 자기력은 왜 생기는지를 묻는다면 입자의 스핀 때문이라고 답하겠죠.
그럼 입자는 왜 스핀이 있는지.. 왜 중력이 있는지...
원래 그런것이야.. 그게 공리야.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건 관찰에 의한 것이지 최초 설계의 관점은 아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도 논란이 많다.
스티븐 호킹의 빅뱅의 허수론도 어차피 수학적 관점이지. 답은 아니다.
이런 모든 것이 우연일까?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은 난 설계자가 있다고 본다.
패턴의 지적설계론에 대해서 혹자는 눈먼 시계공의 바이오므프로 예로 들지도 모른다.
바이오므프야 말로 얼마든지 우연에 의해서 다양한 종들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는 다르게 보인다.
굳이 바이오므프의 최초 패턴을 블루클리처럼 생긴 것으로 할 게 아니라 아예 점으로 출발하면 조합에 의해서 얼마든지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
바로 그 점이라는 만능 키에 의해서 무엇이든지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를 분석하면 바로 그 만능의 점들이 무수한 조합을 이루어 또 점과 같은 패턴을 이루어 낼 것이다.
무신론자나 신을 혐오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의 생각이 엉터리라고 말할 것이다.
위에서 기술한 부분에 대해서 수많은 논리적인 모순을 지적할 지도 모른다.
괴델이 신의 존재에 대해서 수학적으로 증명해도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유한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논리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공리와 같은 하나의 주장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는 말하고 싶은 것은 패턴에 의한 지적설계론을 나는 믿는다.
나는 이런 패턴들을 볼때 누군가가 이 우주를 설계했고
나는 그 설계한 분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물질의 근원을 다루는 분.
시공간을 초월하기 보다는 시공간을 다루는 분.
그렇다면 그분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들은 기적이 아니라 그냥 일상인 것이다.
프로그램 언어의 역사는 기계어로부터 시작되어 저급언어, 고급언어에서 오늘날의 객체지향언어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프로그램 언어들이 점차적으로 발전한 이유는 프로그래머의 같은 물음에서 시작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동일한 작업을 추상화해서 다음에도 최소한의 변경만으로 재활용할까라는
문제였다.
그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프로그램의 언어와 작성기법들이 발전해 나가고
그 고민의 흔적들에 의해서 패턴이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
그런 패턴들의 조합으로 계속해서 창조적이고 효율적인 작업이 이루어진다.
패턴의 조합에 의해 새로 창조된 패턴이 만들어 지고 그 창조된 패턴들의 조합으로
또 다른 창조된 패턴들이 무한루프속에서 계속 뭔가를 생산해 낸다.
처음 한가지 씨앗을 뿌리게 되면 그 씨앗을 중심으로 무한히 반복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이 시나리오...
이런 패턴의 흔적들이 있다면 나는 설계자가 있다고 믿는다.
엔지니어라면 공감할 것이다.
설계의 효율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패턴들이 만들어 질 수 밖에 없음을.
그럼 반대로 어떠한 패턴도 발견할 수 없다면 지적설계도 없는 것일까?
벽에 페인트를 뿌려보라. 일정한 패턴이 있는지를..
계속해서 바뀐다. 수백만번을 반복하면 토기 모양이 나타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뚜렷한 패턴이 없다. 패턴의 관점에서 보면 흩어진 페인트에서는 뽑아 낼 수 있는 그런 속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이란 그런 것이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패턴의 흔적을 찾아보자.
먼저, 창조의 가장 기초가 되는 우주을 보자.
우주에는 수많은 패턴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핵력,중력,전자기력과 입자의 조합으로 모든 것이 창조되어졌다.
우주의 은하도 무거운 물질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은하의 구성요소들이 돌아가고
은하의 하나인 태양계도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움직이며
물질의 작은 단위인 원자를 보아도 핵을 중심으로 전자들이 돌아간다.
물질의 구성이 뭔가 하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기본 패턴이다.
그 패턴을 가지고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가장 큰 우주까지 구성되어 있다.
자연속에 존재하는 패턴은 또 어떨까?
카오스이론에 나오는 몇가지 예를 보자.
나뭇잎을 관찰하면 5배의 배율로 보면 A라는 모양이 나타나다가 20배로 보면 없어졌다가
50배로 보면 또 A라는 모양이 발견되었다가 200배로 보면 또 없어졌다가..
비슷한 패턴이 확대하면 할수록 반복해서 보인다.
망델브로의 프랙탈 해안도
인공위성에서 보면 꾸불꾸불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내려와서 보면 구부러진 면이 실상은 직선에 가깝게 보이고
또 조금 더 내려와서 보면 직선이 아니라 울퉁불퉁해 보이고
다시 조금 더 내려와서 보면 다시 직선처럼 보이고...
생명체의 번성과 감소에서도 불규칙적인 것 같지만 패턴적인 입장에서는 규칙적이며 안정적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우연의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은 다양한 패턴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자연선택에 의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자연은 열역학의 법칙들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법칙들은 왜 그렇게 일어나야만 하는지를 물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수학의 공리처럼 취급한다.
전기력과 자기력은 왜 생기는지를 묻는다면 입자의 스핀 때문이라고 답하겠죠.
그럼 입자는 왜 스핀이 있는지.. 왜 중력이 있는지...
원래 그런것이야.. 그게 공리야.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건 관찰에 의한 것이지 최초 설계의 관점은 아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도 논란이 많다.
스티븐 호킹의 빅뱅의 허수론도 어차피 수학적 관점이지. 답은 아니다.
이런 모든 것이 우연일까?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은 난 설계자가 있다고 본다.
패턴의 지적설계론에 대해서 혹자는 눈먼 시계공의 바이오므프로 예로 들지도 모른다.
바이오므프야 말로 얼마든지 우연에 의해서 다양한 종들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는 다르게 보인다.
굳이 바이오므프의 최초 패턴을 블루클리처럼 생긴 것으로 할 게 아니라 아예 점으로 출발하면 조합에 의해서 얼마든지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
바로 그 점이라는 만능 키에 의해서 무엇이든지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를 분석하면 바로 그 만능의 점들이 무수한 조합을 이루어 또 점과 같은 패턴을 이루어 낼 것이다.
무신론자나 신을 혐오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의 생각이 엉터리라고 말할 것이다.
위에서 기술한 부분에 대해서 수많은 논리적인 모순을 지적할 지도 모른다.
괴델이 신의 존재에 대해서 수학적으로 증명해도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유한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논리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공리와 같은 하나의 주장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는 말하고 싶은 것은 패턴에 의한 지적설계론을 나는 믿는다.
나는 이런 패턴들을 볼때 누군가가 이 우주를 설계했고
나는 그 설계한 분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물질의 근원을 다루는 분.
시공간을 초월하기 보다는 시공간을 다루는 분.
그렇다면 그분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들은 기적이 아니라 그냥 일상인 것이다.
여성의 일관된 진술에 의존한 성범죄 판결
일단은 남성이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고 가정하고 적어본다.
아주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이전에 누적되어 온 피해유형이라고 하자)을 가지고 종합적인 상황을 판단하여 이것이 성범죄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 어둔한 초범의 가해자가 실제로 성범죄를 했을 경우,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전문적인 지식의 필터로 걸러지고 올바른 판단을 하리라 생각한다. 처음 도입시에는 상당히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피해자의 억울함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가해자가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증거부족으로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니.
이제 시간이 10년 정도 흘렀다고 가정하고 소설을 써 보자.
이 전문적인 지식은 어느 정도 일반인에게도 통용되는 지식이 되어 더 이상 전문적이 지식이 아니라고 하자.(물론 범죄도 진화하고 더불어 판단근거도 진화해 갈 것이지만 일단 이렇게 가정하자.)
성범죄 피해에 관한 지식이 있는 한 여성A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여성A는 5명 직원을 가진 소기업에서 일한다.
사장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장은 여성B에게 더 호감을 가지는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구애활동을 펼쳤지만 끝내 연결되지 않았고 소문에 여성B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존심도 상했고 복수을 결심했다.
이 소기업은 허름한 3층짜리 건물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회사나 건물내에는
CCTV도 없다.
3층짜리 건물을 빠져 나오면 바로 앞 인도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CCTV한대가 있다.
어느 날 퇴근할려는 회사사장에게 이 여성A는 서류정리작업을 같이 해 줄 것을 요구했고 단 둘이 사무실에서 서류정리하는 야근을 하게 되었다.
그 날 여직원은 8시에 퇴근하면서 애인이 밖에 데리러 와서 부끄럽다며 사장님은 조금 늦게 나오라고 요구했다. 여직원은 사무실 문을 나서면서 브라우스의 단추 몇개를 풀고 옷을 약간 흐트린 후에 급하게 3층짜리 건물을 뛰쳐 나간후에 잠시뒤에 옷을 추스린 후에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다음날 성범죄를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를 했다.
자.. 이제 어떻게 진행되겠는가???
여자는 구체적으로 일관된 진술을 했고 회사밖 CCTV에 브라우스 단추를 잠그고 옷을 추스리는 장면도 고스란히 찍혀 있다.
여성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억지 소설을 쓰지 말라고.
그래.. 말 그대로 가정을 한 소설이다.
일어날 확률이 낮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누군가 계획하고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다.
물론 역의 경우도 성립한다.
가해자가 마음먹고 하는 경우에도 증거를 찾기 어렵다.
이런 일들이 인간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다.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는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재판이 가능할까?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피해자가 증명할지 가해자가 증명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증명이 될 수 없는 문제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ㄱ소리인 것이다.
추상적인 고통의 개념에 대해서 더 이상 언어만으로 증명할 수 없듯이
자꾸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문제에 집착하여 한날 인간에 불과한
재판관의 시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증거가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피해자가 증명할지 가해자가 증명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증명이 될 수 없는 문제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ㄱ소리인 것이다.
추상적인 고통의 개념에 대해서 더 이상 언어만으로 증명할 수 없듯이
자꾸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문제에 집착하여 한날 인간에 불과한
재판관의 시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증거가 없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은 억울해도 할 수 없이 증거위주로 가야하지 않을까?
아니면 무고죄의 형량을 높여야 하지 않을까?
[라이브 아카데미] 영어 연습가이드
유트브의 라이브 아카데미를 공부하면서 글로써 정리해 보고자 한다.
상당히 잘 설명해 주고 언제나 고마운 유튜버이다.
1. A Big Disadvantage Of Being A Woman
원문 : https://www.youtube.com/watch?v=EAqV2A8C9kI&list=PLIsIUJcT0HIWveTaGptQSm4ZNkF3ZCrBZ
"남자로서 가지게 되는 꽤 큰 장점 중 하나는 밤 늦게까지, 혹은 그냥 밤 늦게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 우리 남자들에게는 자주 드는 그런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너무 일상적인 일이니까요. 근데 제가 이거에 대해서 처음 듣고 솔직히 좀 충격이었고 약간 실망스러웠어요 - 여자들이 단순히 밤 늦게 길을 걷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는지에 대해서요."
1) 남자로서 가지게 되는 꽤 큰 장점은(남자인 것에 대한
→ One Pretty big advantage of being a guy is
2) as much
비교적 상대적으로
3) not having to
to 이하 할 필요가 없다.
4) 밤늦게까지 나가 있는 것.
staying out late at night.
5) 우리 남자들 : us guys.
6) 뉘앙스 차이
a. I think this is something that doesn't occur to us guys.
b. I think this doesn't occur to us guys.
a가 조금 더 자연스럽고 완화된 표현이고 b는 너무 직접적이다. 우리도 대화를 하다보면
논리적으로는 필요없지만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매끄럽게 들리는 말이 있다.
상당히 잘 설명해 주고 언제나 고마운 유튜버이다.
1. A Big Disadvantage Of Being A Woman
원문 : https://www.youtube.com/watch?v=EAqV2A8C9kI&list=PLIsIUJcT0HIWveTaGptQSm4ZNkF3ZCrBZ
"남자로서 가지게 되는 꽤 큰 장점 중 하나는 밤 늦게까지, 혹은 그냥 밤 늦게 밖에 있는 것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 우리 남자들에게는 자주 드는 그런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너무 일상적인 일이니까요. 근데 제가 이거에 대해서 처음 듣고 솔직히 좀 충격이었고 약간 실망스러웠어요 - 여자들이 단순히 밤 늦게 길을 걷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는지에 대해서요."
1) 남자로서 가지게 되는 꽤 큰 장점은(남자인 것에 대한
→ One Pretty big advantage of being a guy is
2) as much
비교적 상대적으로
3) not having to
to 이하 할 필요가 없다.
4) 밤늦게까지 나가 있는 것.
staying out late at night.
5) 우리 남자들 : us guys.
6) 뉘앙스 차이
a. I think this is something that doesn't occur to us guys.
b. I think this doesn't occur to us guys.
a가 조금 더 자연스럽고 완화된 표현이고 b는 너무 직접적이다. 우리도 대화를 하다보면
논리적으로는 필요없지만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매끄럽게 들리는 말이 있다.
스마트폰, 휴대폰(CELLPHONE or SmartPhone)과 666 BEAST
오늘 요한계시록 13장을 읽다가 간만에 666을 보았다.
666이란 단어는 나의 학창시절에 흥미있는 주제중의 하나였다.
여러가지 썰들을 풀어 놓으며 바코드가 666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다.
몇몇의 신학자들은 단지 비유에 불과하다고... 설령 이마에 그런 바코드를 찍어 주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오늘 요한계시록 13장을 읽으면서 컴퓨터가 아닐까 해서 인터넷에 찾아보니
과연 컴퓨터의 수가 666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내용은 억지주장처럼 별로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방금 내 머리속에서 떠 오른 단어 3개로 장난을 쳐 보았다.
COMPUTER, INTERNET, CELLPHONE.
모두 ASCII코드로 변환하여 더하는 식이었다.
(ASCII코드는 컴퓨터에서 숫자(0과1)만 인식되므로 그 숫자를 어떻게 영어로 표현할까 고민다가 만든 약속이다.)
예를 들면
C - ASCII코드 67
O - ASCII코드 79
M - ASCII코드 77
이다.
그렇게 해서 3가지를 더해 보니.
COMPUTER = 623
INTERNET = 617
CELLPHONE = 666
허걱.. CELLPHONE이 요즈음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도구(신용카드까지 휴대폰에 들어가니 매매의 수단이기는 하지만)이지만...
그런데 CELLPHONE의 ASCII코드를 더한 수가 666이 나오다니...
정말로 CELLPHONE이 성경이 말한 666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성경을 보니
짐승과 CELLPHONE이 연결되어야 논리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한 5분정도 더 시간을 투자하여 CELL, CELLULAR까지 검색해 봤지만 짐승과는 쉽게
연결할 수가 없었다.
쩝.... 뭐 성경 연구학자도 아니고 더 깊이 빠지면 확증편향으로 갈 수도 있으니..
여기서 끝내고.
로또 맞은 기분으로 그럴싸한 단어를 3개 찍었는데 그 중에 666이 나와 버리니..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신기하고도 해서 그럴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서 글 남겨 봤습니다.
666이란 단어는 나의 학창시절에 흥미있는 주제중의 하나였다.
여러가지 썰들을 풀어 놓으며 바코드가 666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다.
몇몇의 신학자들은 단지 비유에 불과하다고... 설령 이마에 그런 바코드를 찍어 주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오늘 요한계시록 13장을 읽으면서 컴퓨터가 아닐까 해서 인터넷에 찾아보니
과연 컴퓨터의 수가 666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내용은 억지주장처럼 별로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방금 내 머리속에서 떠 오른 단어 3개로 장난을 쳐 보았다.
COMPUTER, INTERNET, CELLPHONE.
모두 ASCII코드로 변환하여 더하는 식이었다.
(ASCII코드는 컴퓨터에서 숫자(0과1)만 인식되므로 그 숫자를 어떻게 영어로 표현할까 고민다가 만든 약속이다.)
예를 들면
C - ASCII코드 67
O - ASCII코드 79
M - ASCII코드 77
이다.
그렇게 해서 3가지를 더해 보니.
COMPUTER = 623
INTERNET = 617
CELLPHONE = 666
허걱.. CELLPHONE이 요즈음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도구(신용카드까지 휴대폰에 들어가니 매매의 수단이기는 하지만)이지만...
그런데 CELLPHONE의 ASCII코드를 더한 수가 666이 나오다니...
정말로 CELLPHONE이 성경이 말한 666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도 들었다.
조금 더 성경을 보니
짐승과 CELLPHONE이 연결되어야 논리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한 5분정도 더 시간을 투자하여 CELL, CELLULAR까지 검색해 봤지만 짐승과는 쉽게
연결할 수가 없었다.
쩝.... 뭐 성경 연구학자도 아니고 더 깊이 빠지면 확증편향으로 갈 수도 있으니..
여기서 끝내고.
로또 맞은 기분으로 그럴싸한 단어를 3개 찍었는데 그 중에 666이 나와 버리니..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신기하고도 해서 그럴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서 글 남겨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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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낮은 음을 화음으로 연주하면 불편하게 들릴까?
C코드의 경우에는 도,미,솔이라는 3가지 음으로 구성된다. 피아노나 기타로 연주하면 전혀 불편함 없이 아름답게 들린다. 그런데 더블베이스(베이스기타)로 도,미,솔을 누르고 연주하면 뭔가 불협화음처럼 들린다. (피아노에서도 낮은 옥타브에서 C코드를 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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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뉴스를 보다가 재밌는 사진을 발견했다. 왕립학회에서 과학에 관한 사진을 게시하였는데 표면장력에 관한 사진이 올라와 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제시했던 공간의 휘어짐을 그대로 잘 표현한 것 같다. 그냥 격자무늬가 일반적인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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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누군가 로또 1등이 당첨되었다고 얘기를 듣게 되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쉬쉬해서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 주변의 누군가가 로또1등에 당첨되었다라는 소식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야.. 그 친구가 로또 1등 당첨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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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가 부를 얻게 될까? 당연히 금융에 대해서 허수놀음을 하는 자가 부를 가지게 될 확률이 높다. 두번째는 누구일까? 생산수단을 가지는 자가 부를 얻게 된다. 초기 자본주의 생산수단은 생산설비를 말할 것이다. 생산설비를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