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본질은 작품 그 자체일까? 아니면 주변요소도 포함될까?

작품의 본질은 작품 그 자체일까? 아니면 주변요소(작가,시대상등)도 포함될까?

여기서 작품이라 함은 미술작품 음악작품 문학작품등을 의미한다.
요 며칠전에 인문계열 출신자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하나의 작품에 대해서 논할때 작가를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란 의견을 들었다. 누가 그 작품을 창작해 내었는지는 중요한 요소라고. 누가 창작했는지에 따라 작품 이외의 시대상이라든지 주변 요소를 감지할 수 있다고한다. 작품 해석을 위해서는 때로는 불가피하게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의 발자취가 필요하지만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되면 편견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 있을까?

철학적 고찰을 위해서 또 소설을 써 보자.
어떤 부자 부부가 있는데 한명은 심리학자이고 또 다른 한명은 고고학자이다.
노년을 위해서 교외의 오래된 성을 구입하여 내부를 리모델링 하였다.
리모델리 하는중에 어떤 고고문서를 발견하였는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6번이었다.
고고학자는 엄청난 희열과 함께 당장 세상에 발표할려고 했지만
심리학자는 그 전부터 해 보고 싶은 TEST가 있었다.
예술작품의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TEST였다.
TEST는 이러했다.
베토벤의 새로운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6번을 내어서 온라인에 업로드 시켰다고 하자.
베토벤이 직접 작곡하였기에 베토벤풍의 느낌은 물씬 풍긴다.

자 이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과연 그 작품에 열광할까?
그 작품이 업로드 된 것도 모르니까 열광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럼 주요 매체에 광고비를 수십억원 들여서 복면가왕처럼
이 시대에 베토벤이 빙의했다면서 모든 사람에게 알렸다고 가정하자.
베토벤이 직접 작곡했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베일에 가려진 어떤 작곡가가 베토벤 흉내를 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제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까?
광고비를 수십억씩 사용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은 들어 볼 것이다.
그리고는 베토벤의 느낌이 나기는 나네... 딱 거기까지다.
열광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베토벤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3개월뒤에 진짜 이 작품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6번이라고 발표한다.
그때부터 수많은 검증작업을 거쳐서 진품인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때부터 대중들은 미친듯이 열광할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베토벤이 아니라고 했을때에는 열광하지 않다가 베토벤이라고 하니까 열광한다.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 현상이 당연한가?
현상만을 놓고 보면 나 역시 인문학 출신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베토벤이라는 친필이 들어가니까 그 때부터 그 작품의 가치는 올라가니.
그런데 그 작품은 음표하나 바뀐 것이 없다.
그 전에도 후에도 그 작품은 동일한 것이다.

어떻게 결론내어야 할까?
작품에 가치를 부여한 인간들의 집단적인 행동양식?
아니면 해석의 차이.
작품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본질적인 것이 비본질적인 다수의 생각에 따라서 변화한 것이다.
그냥 인간의 모순적인 행동양식을 정당화한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 시장에서도 그 예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제품이 있는데 그 제품은 변하지 않았는데 광고를 통해 어떤 해석을 하고 어떤 이미지를 심어주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는 얼마든지 변한다.
나에게는 적어도 이 작품의 문제도 그렇게 보인다.
작품 그 자체보다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고
그 해석은 끝내 다수의 대중들 또는 전문가에 의해서 평가하고
다수의 대중은 베토벤의 친필하나에 마음이 움직이므로 그 가치가 변하는 것이라고.

이런 문제도 그러할진대..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뜻과 관계없이 다수에 의해서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인간세계의 속성이 아닐까?

가상화폐에 대한 시각

요즈음 가상화폐 투자가 뜨겁다.
해서, 내 생각을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시장경제는 실물경제와 금융경제 두가지로 구분한다.
두 가지 모두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나아가게 되지만 내가 보는 관점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 같다.
실수(real number)에 의해서 허수가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허수에 의해서 실수가 따라온다.
신용사회로 넘어오면서 모든 것이 허수로 변했다.
실질적인 것은 없다. 가상세계에서만 서로 왔다갔다할 뿐이다.
은행의 시초도 사기꾼에 의해서 출발하였지만 지금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당시에 누구에게나 이 은행얘기를 들려주면 사기꾼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암묵적인 합의(아니면 합리적 합의)에 의해서 그냥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뱅크런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전제조건하에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서 미국에 맡겨둔 금을 다시 찾겠다고 하니 한바탕 난리를 친 것도 기억할 것이다.
내가 맡겨둔 것을 찾는다고 하니.. 없다..
내가 맡겨둔 금이 없다.
금도 은행과 마찬가지로 10을 전당포에 맡기면 시장에 유통되는 것은 100이다.
여기저기에 금보유 증서를 써 주어서 허수의 금이 90이 존재하는 것이다.
실물로써의 금은 7~8정도 유통되고 나머지는 모두 증서로써 유통될 뿐이다.
이 상황에서 독일이 내 금 10개를 달라고 하니.. 있을리가 없다.

이전에 유시민씨가 나와서 가상화폐에 대해서 설전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나로써는 조금 동의하기 어려웠다.
튤립을 예로 들면서 튤립이라는 실체가 있었지만 가상화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지금의 자본 시장은 단지 트리거만 걸어주면 나머지는 실체와는 관계없다.
가상으로 돌아간다. 허수이다. 실물거래가 아닌 숫자만 왔다갔다할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가상화폐를 바라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최초의 트리거만 있으면 된다. 물레방아처럼 계속 끊임없이 외부에서 물이 공급되면서 돌아간다.
그런게 지금의 돈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가상화폐는 누군가에 의해서 트리거가 걸렸고 이미 지하세계의 검은돈으로 이미 많은 거래가 되고 있다.
이미 시장이 형성되었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가상화폐는 계속 유지될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비트코인은 배(실제지불금액)보다 배꼽(수수료)이 크다.
그래서 종국에는 비트코인은 폭락할까?
비트코인 자체만 보면 검증을 위한 채굴비용이 더 많이 들어감으로써 논리적으로 한계에 부딪혀서 신기루로 끝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비트코인에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우회로를 만들어 가치를 계속 유지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또한 가상화폐 거래 사이트가 주식처럼 사고 팔게끔 함으로써 이미 기술적인 부분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수많은 인원이 참여한 하나의 시장이 되었고 그것이 실체가 있든 없든 이미 가치를 부여하였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보면, 자본주의에서는 국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힘은 통화량 조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이 권리를 포기한다면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국가가 가상화폐를 발행할 수는 있지만 현재 통화되고 있는 가상화폐가 국가의 지위를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이것도 단지 예상이다.
인간에게는 돌발행동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이다.
아마도 현재의 가상화폐는 시장이 이미 형성되었기에 없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추측된다.
경쟁 관계에 있다가 점차 몇개의 굵직한 가상화폐만 남기고 통합될 것이다.
그리고 그후에는 다른 금,은,구리와 같은 원자재처럼 하나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18년 어느날.. 가상화폐를 한번 생각해 보다.

어차피 일어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을 보며

주변에 누군가 로또 1등이 당첨되었다고 얘기를 듣게 되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쉬쉬해서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 주변의 누군가가 로또1등에 당첨되었다라는
소식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야.. 그 친구가 로또 1등 당첨되었다면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다.
신기하다. 내 주변에도 로또 1등 당첨되는 사람이 있다니..
그런데 조금 범위를 넓혀 보자.
전국으로 보면 로또 1등은 매주 1명도 아니고 여러명이 나온다.
5명이 나온다고 가정하고 이제 확률적으로 접근해 보자.
로또의 당첨 확률이 대략 1/8백만이고
내 지인이 로또를 사는 사람이 1000명이라고 가정하면,

한주에 5명이 나오니까
 5/8백만으로 숫자로 나오고 일년에 52주이므로
 5*52*1000/8백 = 30.769...

즉, 확률적으로 계산하면 30년이 지나면 내 주변에 반드시 로또 당첨자는 나오게 마련이다.
내가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극히 미비하지만 내 주변에 로또 당첨자는 내가 오래살게 되면
언제나 한번쯤은 만나게 되어 있다.
단지 1등임을 밝히지 않아서 못 만날 뿐이지.

사람들은 높은 확률에 대해서 의미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한걸음 물러서서 확률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들 교회내의 기독교 환자들을 보면 가끔씩 착각속에 살아가는 것 같다.
희박한 확률이 이루어지면 신의 뜻인냥...
신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관점에서 맞으면 그게 신의 뜻이다.
사업에서 성공했다고...
그렇게 어려운 확률을 뚫었다면 뭔가 신의 계시가 있다고..
그 어려운 확률속에 당첨된 택한(?) 자들이 간증을 하면 묘한 설득력을 갖추게 된다.
로또의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어려운 확률이지만
매주마다 몇 명의 당첨자는 거의 반드시 나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그래서 1등 당첨자의 말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난센스가 아닌가?

당신은 생산자입니까 소비자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가 부를 얻게 될까?
당연히 금융에 대해서 허수놀음을 하는 자가 부를 가지게 될 확률이 높다.
두번째는 누구일까?
생산수단을 가지는 자가 부를 얻게 된다.
초기 자본주의 생산수단은 생산설비를 말할 것이다.
생산설비를 가지고 물건을 찍어내고 그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버는 구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시대가 흘러 정보화 시대를 거치면서 생산수단은 바뀌게 된다.
정보, 즉 흔히 말하는 컨텐츠를 생산하는 자가 생산자이고 그것을 이용하는 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동일하게 생산활동을 하는 자는 돈을 벌고 소비자는 돈을 지불하는 구조이다.
이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생산자가 될려면 생산설비의 초기 투자금이 많이 들어가므로 진압장벽이 꽤 높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생산자가 된다. 물론 성공한 생산자이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나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생산해 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거의 전무하다.
산업화시대의 생산수단을 가질려고만 하고 정작 정보화시대에서는 소비만 한다.
시대가 변한 것을 느끼면서도 정작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내 자신.



코르나때 현장예배를 고수하는 교회를 보며

코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현장예배를 고수하는 많은 교회를 보게된다.
여기서 또 궁금증이 폭발한다.
그들은 뭐라고 하면서 현장예배를 주장할까?
크게 2가지 주장으로 압축되는 것 같다.

1)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예배이다.
그럼 당연히 예배의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도대체 예배라는 것은 무엇인지?
여기저기 검색해 보니 사전적 의미는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리는 것이
예배적 의미이고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 보면
진정한 예배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를 보게 된다.
진정한 예배의 정의는 대부분의 검색에서는 신령과 진정이란 단어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 행위를 위해서는 시공간을 뛰어넘음을 의미한다.
교회에서의 경배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모든 공간에서 드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안에 가두어 좁은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창조주의 하나님을 선포하기에
굳이 교회안으로 한정하지 않고 민족을 뛰어넘은 예배를 의미한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대화에서도 예배의 장소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유대인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만을 고수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의 4장의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념처럼 떠 받쳐던 예루살렘의 예배를 허물고 계신다.
장소가 그렇게 중요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이때"라는 시간에 초점을 두고
"신령과진정"이라는 자세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도 꼭 교회에서만 예배드려야 하는가?
다음을 가정하며 이런 자들에게 묻고 싶다.
전쟁중이라고 하자. 1000명의 무리와 함께 산길을 헤치며 피난길에 올랐다.
산턱 중간에 적들이 있기에 침묵을 유지하며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
피난중에 일요일 11시가 되었다. 피난민 중에 50명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있다.
일요일 11시이니 우리의 예식대로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려야겠다며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적들에게 들켜 나머지 950명도 같이 몰살당했다.
이런 극단적 예를 제시하였음에도 그 상황이라도 예배를 드리겠다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제로 많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이 상황에서도 예배를 드릴려고 할 것이다.
옆에 죄없는 나머지 950명이 죽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그런 예배를 기뻐할까?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기 위해서 50명이 목숨바쳐서 예배 드렸고
그 중에서 나머지 950명도 같이 목숨을 바치게 만든 그 예배..
그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인지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봤으면 한다.

2) 왜 교회만 문 닫아야 하는가?
이 주장을 하면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흔히 좌파세력의 기독교 죽이기이다.
공산주의 세력들이 득세하면서 유독 교회에 대해서만 바이러스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임시적으로 문을 닫게 한 후에 장기적인 계략으로 북한이나 중국처럼 모든 교회 문을 닫게 만든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더 논의하기 위해서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필요하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고 교회 구성원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
교회 역할은 사랑을 하고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딱 2가지이다.
여러 책들에서 교회의 역할을 3가지로 혹은 10가지 나누어 설명하지만 2가지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일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그 예배에 관한 것은 첫번째 주제에서 논의하였기에 넘어가자.
두번째 이웃사랑의 관점에서만 보자.
백화점도 식당도 문열고 영업하는데 왜 우리만 닫아야 하나?
그 항변에는 영업적인 측면에서는 동의하지만 이웃사랑의 관점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교회는 장사하고 영업하는 곳이 아니고 대중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곳이다.
그리스도가 누군인지를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는 곳이다.
선교 초기에 왜 대중들은 그리스도를 주라 받아 들였을까?
논리적인 연결이 아니라 감성적인 연결이었다.
감성이 아니라 어쩌면 감동적인 연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지 모르겠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면 당황하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까?
왜 나에게 이런 혜택을 베푸는지..
그게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어찌 궁금하지 않으랴..
이런 교회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왜 우리만 문 닫아야 하는가라고 천박하게 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내의 집단 감염이 생기면..
교회 모든 사람들이 다 자살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웃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감동이 아니라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또 예배를 거론하지 말기를 바란다. 첫번째 주제에서 이미 논했기에..
교회는 백화점도 식당도 아니고 거대한 비지니스를 행하는 대기업도 아니다.
거저 섬기고 바보같이 퍼 주는 곳이다.
제발 교회가 피해자인냥 코스프레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다가 핍박받는 것은 핍박이 아니라 인과응보이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더 나아가 섬김의 자리까지 이르렀지만
예배만으로 미움을 받을때가 핍박일 것이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공감하기 어려운데 어느 누가 공감하랴?

보수 기독교 신문에서는 연일 코르나에도 왜 예배를 강행해야 하는지를 논설로 싣고 있다.
다소 현학적인 보이는 해석부터 짧은 주장까지..
마지막으로 변호인 영화에서 송강호의 이 대사가 떠 오른다.
"니는 니가 애국자 같나? 천만에 니는 죄없고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이다"
나에게 적용하자. 현상과 해석에 대한 통찰을 더 주의깊게 바라보자.
잘못된 신념으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났을때
애국자가 아니라 버러지의 삶을 살아왔다는 비극을 맞지 않기 위해서.

여자 약사의 동성애 강의를 듣고.

저희 교회에 여자 약사가 와서 동성애 강의를 했습니다.
듣고 정리만 해 두었다가 이제야 올리게 되네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주제이네요.

- 동성애 특강을 듣고 -
어제 동성애 강의를 듣고 우려스러운 점들이 있어서 글 올립니다.
저는 동성애자도 아니고 오히려 혐오스럽기도 한 입장입니다.
이런 글을 적는다는 것이 부담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서 적어 봅니다.

1) 기독교의 핵심원리인 사랑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강사가 동성애자를 만나서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할려고 한 흔적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나면 동성애를 혐오하게 되고,
 예방차원에서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있겠죠.
 하지만 그 중에 동성애자가 있고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가족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설교가 도움이 될까요?
 동성애가 아니라 창녀에 대해서 관점을 옮겨봅시다.
 죄됨을 강조하고 이슈화하면 과연 그 창녀가
 교회로 올 수 있을까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몸을 팔게 되었는지? 그도 이 일을 즐길까?
 현상만을 놓고 죄라고 단정짓고 강조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의 입장에서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돈하는 설명.
 인과관계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설명하고 상관관계를 마치 인과관계처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강사왈 : "동성애를 받아들이면 교세가 확줄어든다. 선진국이 그렇다"라고
 했는데 교세가 줄어든 이유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관이 바뀌어서 그럴 수도 있고 교회자체가 타락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할때는 근거와 검증의 자료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은 채 설명하는 것은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또한 동성애 다음에 수간이다?
 (물론 큰 맥락은 차별금지법이었지만..)
 그것 또한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명해야 하는데 그냥 전제조건처럼
 애기해 버렸습니다.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소세지를 먹었더니 배가 아팠다. 소세지는
 나쁘니까 먹지마라. 사실은 소세지에 핀 곰팜이가 원인이었는데
 단순히 소세지를 먹었더니 배가 아프니까 먹지마라???
 적어도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서 진짜 그런가를 되뇌이며
 검증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도 있어야 하는데...
 현상에 대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엮어서 설명해 버렸습니다.

3) 논리적인 비약이 심했습니다.
 예를 들면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면
 강사왈 : "회사원과 고등학생이 항문성교내용이 방송에 나와도 항의를 못한다"
 라고 들었는데 정말 그럴까요?
 동성애를 떠나서 현재 상식으로도 여고생과 회사원이 질삽입 성교내용이
 방송에 나와도 무방한가요?
 물론 강사가 동성애 대한 혐오를 표현하기 위해서 노골적인 하나의 예이겠죠.
 하고 싶은 말은 동성애 관련방송이 나올 것이다라는 맥락이지만 그 예가 적절하지
 않았기에 나도 노골적인 예로 대응했습니다.
 강사왈 : "선진국의 목사들이 차별금지법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라고 예를 들었는데
 그 비율이 얼마이며 제가 알고 있기로는 대부분의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상식선에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소당하는 것도 아주 심하게 인격적인
 모독을 했거나 아니면 동성애를 적극 옹호하는 사람 중 한명이 걸고 넘어졌거나
 그렇게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또한 미국 교계의 주류(쭉정이라고 표현하더군요)가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 주례를 반대한 목사는 잘려나갔다라고 표현하던데.. 그것도 제 상식 밖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알기로는 대부분 주류세력은 아직도 동성애에 대해서 이해는 하지만
 부정적인 입장이고 비주류 세력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옹호론자들입니다.

그냥 생각들을 막 적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적는 이유는 이런 기독교가 너무 싫습니다.
언젠가 천주교에 대해서 신랄하게 까는 설교을 듣었습니다.
그게 제가 아는 천주교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후 세월이 흘러 회사에서 천주교 신자와 얘기를 했는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너무 무식했더군요.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한데 기독교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이고
동성애를 막아야 되겠다고 판단하면 너무나 무분별하게 정보를 아무 검증없이
살포해서 사회로부터 또 비난을 받습니다.

끝으로 제쪽에서 바라보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입니다.
모든 동성애에 대해서 죄라고 하기 보다는
나누어서 생각했으면 합니다.
성적타락에 의해서 동성애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말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근거는 동물들도 동성애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 동성애를 하면
화형을 시켰음에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지만 그 무언가는 있다라고 봐야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다르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동성애에 대해 어느 정도 포용하다 보면 성적자기결정권이니 동성결혼까지 이르게 되면서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사람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므로 저도 우려가 됩니다.
그래도 어제와 같은 식의 강의는 더 위험하다란 생각에서 적어 보았습니다.

교회를 옮기는 이유

떠날때는 조용히 떠나야 하는데..
이런 항변으로 조그만한 돌이라도 던져 놓으면
그 작은 물결이 생각의 자리로 이끌어 내지 않을까 하여
글을 적습니다.

사실은 작년에 떠날까 고민하다가 1년을 더 기도하면서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독교인이 사회에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몇 권의 책도 읽어보고 사복음서 중심으로 정독도 해 보았습니다.
그럴수록 괴리감은 커져갔습니다.
내가 교회를 개혁하는 주체자가 되자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나의 성향이나 나의 그릇으로 그러지 못함을 잘 압니다.
동참은 할 수 있을련지 모르지만 내가 앞장서서 나가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런 개혁을 일으킬만큼 윤리적으로 깨끗하지도 못하고
그런 개혁을 일으킬만큼 열정적이지도 못하고
그것을 감당할만큼 그런 사명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의 개혁이란 말이 아닌 삶이 뒷받침될때 파급력도 있고
영향력을 가지며 이루어지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끊임없이 내면을 괴롭히는 주제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제대로 가고 있고 그 안에 속해 있는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너무나도 정교분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권력이랑 분리되어야 하는데 의미가 변질되어 버려서
말그대로 정치와 분리해 버렸습니다.
설교가 우리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듯이
정치 또한 그런 문제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교회는 종북과 죄의 프레임에 갇혀서 더 우선순위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가끔씩 기독교 환자라는 느낌도 듭니다.
일제시대의 기독교와 군사정권이후의 기독교는 너무 다릅니다.
행동하는 복음이었는데.. 군사정권시절부터는 미국의 관계개선에
이용되어지는 기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교분리.
신앙인은 데모하면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오늘날의 이신칭의와 같은 논쟁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라는 훌륭한 제도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주권을 국민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너희에게 허락되었으니 잘 운영하라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너희가 일하라고.
그런데 교회는 기도만 하고 있고
교회안의 행사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할려면 기도뿐 아니라 공부를 해야하는데...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는 심각한 문제에도 침묵하고
세월호로 억울하게 죽은 학생들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침목하고
지금의 박근혜게이트가 터져나와도 그렇게 지원해 준 목사들의 회개없이
밑도 끝도 없이 우리의 죄때문이라며 회개기도를 촉구하면서 본질을 흐려 버립니다.
본질을 잡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묵상하면 할수록
지금의 교회의 형태와는 이질감이 더욱 느껴집니다.
아마 한국교회는 동성애와 이슬람 문제를 약속해 주면
하나님 나라의 더 높은 가치인 작은 자에 대한 정책이 후퇴해도
그 후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묻지도 않고 트럼프와 같은 그런 후보를 지지할 것입니다.
죄의 세력이라는 프레임에 넣기만 하면 모든 공식이 성립되어
기독교의 지지를 쉽게 얻고 기독교를 이용합니다.
설교와 정치에 대한 비판이나 독서를 통한 토론문화가 생겨나지 않으면
언론이 만들어 낸 그 프레임의 늪에서 허우적 될 것입니다.
지금의 ㅇㅇ교회는 개인의 영성문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만족하지만
위에서 서술한 문제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곳으로 떠남으로 답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소극적이며 이기적인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제 의견을 곡해할까봐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이 글은 저처럼 교회를 떠나라는 의도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하는 의도입니다.
정치와 교회는 분리될 수 있는지를..
각자 있는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정치에 참여했으면 하는
의도입니다.
섬기는 교회는 달라도
종국에는 다같이 칭찬받는 주의 백성이길 기도합니다.

내가 유신론자인 이유

나는 프로그래머이다.
프로그램 언어의 역사는 기계어로부터 시작되어 저급언어, 고급언어에서 오늘날의 객체지향언어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렇게 프로그램 언어들이 점차적으로 발전한 이유는 프로그래머의 같은 물음에서 시작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동일한 작업을 추상화해서 다음에도 최소한의 변경만으로 재활용할까라는
문제였다.
그런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프로그램의 언어와 작성기법들이 발전해 나가고
그 고민의 흔적들에 의해서 패턴이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
그런 패턴들의 조합으로 계속해서 창조적이고 효율적인 작업이 이루어진다.
패턴의 조합에 의해 새로 창조된 패턴이 만들어 지고 그 창조된 패턴들의 조합으로
또 다른 창조된 패턴들이 무한루프속에서 계속 뭔가를 생산해 낸다.
처음 한가지 씨앗을 뿌리게 되면 그 씨앗을 중심으로 무한히 반복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이 시나리오...
이런 패턴의 흔적들이 있다면 나는 설계자가 있다고 믿는다.
엔지니어라면 공감할 것이다.
설계의 효율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패턴들이 만들어 질 수 밖에 없음을.

그럼 반대로 어떠한 패턴도 발견할 수 없다면 지적설계도 없는 것일까?
벽에 페인트를 뿌려보라. 일정한 패턴이 있는지를..
계속해서 바뀐다. 수백만번을 반복하면 토기 모양이 나타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뚜렷한 패턴이 없다. 패턴의 관점에서 보면 흩어진 페인트에서는 뽑아 낼 수 있는 그런 속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이란 그런 것이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패턴의 흔적을 찾아보자.
먼저, 창조의 가장 기초가 되는 우주을 보자.
우주에는 수많은 패턴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핵력,중력,전자기력과 입자의 조합으로 모든 것이 창조되어졌다.
우주의 은하도 무거운 물질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은하의 구성요소들이 돌아가고
은하의 하나인 태양계도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움직이며
물질의 작은 단위인 원자를 보아도 핵을 중심으로 전자들이 돌아간다.
물질의 구성이 뭔가 하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기본 패턴이다.
그 패턴을 가지고 가장 작은 단위에서부터 가장 큰 우주까지 구성되어 있다.
자연속에 존재하는 패턴은 또 어떨까?
카오스이론에 나오는 몇가지 예를 보자.
나뭇잎을 관찰하면 5배의 배율로 보면 A라는 모양이 나타나다가 20배로 보면 없어졌다가
50배로 보면 또 A라는 모양이 발견되었다가 200배로 보면 또 없어졌다가..
비슷한 패턴이 확대하면 할수록 반복해서 보인다.
망델브로의 프랙탈 해안도
인공위성에서 보면 꾸불꾸불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내려와서 보면 구부러진 면이 실상은 직선에 가깝게 보이고
또 조금 더 내려와서 보면 직선이 아니라 울퉁불퉁해 보이고
다시 조금 더 내려와서 보면 다시 직선처럼 보이고...
생명체의 번성과 감소에서도 불규칙적인 것 같지만 패턴적인 입장에서는 규칙적이며 안정적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우연의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은 다양한 패턴들이 존재하고 수많은 자연선택에 의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라고.
자연은 열역학의 법칙들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법칙들은 왜 그렇게 일어나야만 하는지를 물어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수학의 공리처럼 취급한다.
전기력과 자기력은 왜 생기는지를 묻는다면 입자의 스핀 때문이라고 답하겠죠.
그럼 입자는 왜 스핀이 있는지.. 왜 중력이 있는지...
원래 그런것이야.. 그게 공리야.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건 관찰에 의한 것이지 최초 설계의 관점은 아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도 논란이 많다.
스티븐 호킹의 빅뱅의 허수론도 어차피 수학적 관점이지. 답은 아니다.
이런 모든 것이 우연일까?
패턴이 존재한다는 것은 난 설계자가 있다고 본다.
패턴의 지적설계론에 대해서 혹자는 눈먼 시계공의 바이오므프로 예로 들지도 모른다.
바이오므프야 말로 얼마든지 우연에 의해서 다양한 종들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는 다르게 보인다.
굳이 바이오므프의 최초 패턴을 블루클리처럼 생긴 것으로 할 게 아니라 아예 점으로 출발하면 조합에 의해서 얼마든지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
바로 그 점이라는 만능 키에 의해서 무엇이든지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를 분석하면 바로 그 만능의 점들이 무수한 조합을 이루어 또 점과 같은 패턴을 이루어 낼 것이다.
무신론자나 신을 혐오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의 생각이 엉터리라고 말할 것이다.
위에서 기술한 부분에 대해서 수많은 논리적인 모순을 지적할 지도 모른다.
괴델이 신의 존재에 대해서 수학적으로 증명해도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유한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논리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공리와 같은 하나의 주장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는 말하고 싶은 것은 패턴에 의한 지적설계론을 나는 믿는다.
나는 이런 패턴들을 볼때 누군가가 이 우주를 설계했고
나는 그 설계한 분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다.
물질의 근원을 다루는 분.
시공간을 초월하기 보다는 시공간을 다루는 분.
그렇다면 그분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들은 기적이 아니라 그냥 일상인 것이다.

인지편항대도감1

 NEWTON 24년 3월호에 나온 특집기사를 요약해 본다. 인지편향은 마음의 안정과 신속한 판단을 가지는 장점과 함께 잘못된 판단 및 편견으로 이끄는  요인이기도 하다.  한번쯤은 이런 편향에 빠지지 않았는지를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