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교육의 필요성1(벌레잡기)


소프트웨어을 이용한 벌레(버그)잡기.
내가 말하는 소프트웨어는 간단한 소프트웨어를 의미하지 않는다.
코드라인이 적어도 5만라인 이상을 의미한다.
그만큼 복잡도가 있는 소프트웨어라는 전제하에 얘기한다.
그런 프로그램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기초 프로그램을 익혀야 한다.
코딩을 하면 머리가 좋아지니 어쩌니 하는데 반만 동의한다.
기초를 익히는 것만으로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은 구라다.
if문 for문 또는 어셈블리와 변수등을 기본 재료를 배운다고 머리가 좋아져??
아니다. 단언컨대 아니다.
경험상으로는 디버깅하면서 사고가 논리적으로 많이 변한다.
간단한 프로그램도 디버깅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논리적인 사고가 없어도 가능하다.
코드가 워낙 간단하므로.
물론 처음에는 이것조차도 어렵다. 점하나 잘못찍어서 에러가 발생하는데 도통 알 수가 없다.
툴을 다루는데 서툰 것이지 논리적인 사고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하지만, 복잡한 프로그램에서 버그가 발생한 경우에는 무턱대고 이것저것 고쳐 보아라.
벌레 잡기가 만만치 않다.
나도 생각하기 싫어하고 논리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바보도 아니다.
계속해서 삽질을 하다 보면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삽질하면서 근육을 키우다 보면 벌레를 잡기 위한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내가 하는 벌레 잡기 놀이는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1) 문제점에 대한 현상을 기록한다.
  -> 수사관이 증거를 수집하듯 증거가 될만한 현상은 캡처를 하든지 기록한다.
2) 수집된 현상(증거)를 가지고 예상 문제점1을 적어 본다.
3) 사고실험을 하여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면 예상 문제점2로 넘어간다.
4) 예상문제점2을 가지고 문제를 추적해 간다.
5) 다시 수정하여 수정 예상문제점2을 적고 다시 상세 추적하여
6) 문제점에 대한 원인을 정리
7) 원인에 대한 대책방법 수립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재현이 잘 되지 않는 문제점에 대해서 추적해 나간다.
회사라면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때에는 집단지성을 이용하면 꽤 도움이 된다.
회의를 수집하여 자신만의 시나리오을 가지고 발표하고 사고실험을 하면서
아가리 파이터를 하다보면 조금 더 문제의 핵심에 다가갈 것이다.

소프트웨어 교육은 바로 이런 점에서 필요하다.
다른 어떤 교육보다도 논리적인 사고를 요구하고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수사관들만 사건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면 수사관들과 동일하게 문제점을 발견하고 실험해보고 추적해 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다.


작품의 본질은 작품 그 자체일까? 아니면 주변요소도 포함될까?

작품의 본질은 작품 그 자체일까? 아니면 주변요소(작가,시대상등)도 포함될까?

여기서 작품이라 함은 미술작품 음악작품 문학작품등을 의미한다.
요 며칠전에 인문계열 출신자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하나의 작품에 대해서 논할때 작가를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란 의견을 들었다. 누가 그 작품을 창작해 내었는지는 중요한 요소라고. 누가 창작했는지에 따라 작품 이외의 시대상이라든지 주변 요소를 감지할 수 있다고한다. 작품 해석을 위해서는 때로는 불가피하게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의 발자취가 필요하지만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되면 편견이라는 요소를 배제할 수 있을까?

철학적 고찰을 위해서 또 소설을 써 보자.
어떤 부자 부부가 있는데 한명은 심리학자이고 또 다른 한명은 고고학자이다.
노년을 위해서 교외의 오래된 성을 구입하여 내부를 리모델링 하였다.
리모델리 하는중에 어떤 고고문서를 발견하였는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6번이었다.
고고학자는 엄청난 희열과 함께 당장 세상에 발표할려고 했지만
심리학자는 그 전부터 해 보고 싶은 TEST가 있었다.
예술작품의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TEST였다.
TEST는 이러했다.
베토벤의 새로운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6번을 내어서 온라인에 업로드 시켰다고 하자.
베토벤이 직접 작곡하였기에 베토벤풍의 느낌은 물씬 풍긴다.

자 이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과연 그 작품에 열광할까?
그 작품이 업로드 된 것도 모르니까 열광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럼 주요 매체에 광고비를 수십억원 들여서 복면가왕처럼
이 시대에 베토벤이 빙의했다면서 모든 사람에게 알렸다고 가정하자.
베토벤이 직접 작곡했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베일에 가려진 어떤 작곡가가 베토벤 흉내를 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제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까?
광고비를 수십억씩 사용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은 들어 볼 것이다.
그리고는 베토벤의 느낌이 나기는 나네... 딱 거기까지다.
열광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베토벤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3개월뒤에 진짜 이 작품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6번이라고 발표한다.
그때부터 수많은 검증작업을 거쳐서 진품인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때부터 대중들은 미친듯이 열광할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베토벤이 아니라고 했을때에는 열광하지 않다가 베토벤이라고 하니까 열광한다.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 현상이 당연한가?
현상만을 놓고 보면 나 역시 인문학 출신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베토벤이라는 친필이 들어가니까 그 때부터 그 작품의 가치는 올라가니.
그런데 그 작품은 음표하나 바뀐 것이 없다.
그 전에도 후에도 그 작품은 동일한 것이다.

어떻게 결론내어야 할까?
작품에 가치를 부여한 인간들의 집단적인 행동양식?
아니면 해석의 차이.
작품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본질적인 것이 비본질적인 다수의 생각에 따라서 변화한 것이다.
그냥 인간의 모순적인 행동양식을 정당화한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 시장에서도 그 예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제품이 있는데 그 제품은 변하지 않았는데 광고를 통해 어떤 해석을 하고 어떤 이미지를 심어주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는 얼마든지 변한다.
나에게는 적어도 이 작품의 문제도 그렇게 보인다.
작품 그 자체보다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고
그 해석은 끝내 다수의 대중들 또는 전문가에 의해서 평가하고
다수의 대중은 베토벤의 친필하나에 마음이 움직이므로 그 가치가 변하는 것이라고.

이런 문제도 그러할진대..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뜻과 관계없이 다수에 의해서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인간세계의 속성이 아닐까?

가상화폐에 대한 시각

요즈음 가상화폐 투자가 뜨겁다.
해서, 내 생각을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시장경제는 실물경제와 금융경제 두가지로 구분한다.
두 가지 모두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나아가게 되지만 내가 보는 관점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 같다.
실수(real number)에 의해서 허수가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허수에 의해서 실수가 따라온다.
신용사회로 넘어오면서 모든 것이 허수로 변했다.
실질적인 것은 없다. 가상세계에서만 서로 왔다갔다할 뿐이다.
은행의 시초도 사기꾼에 의해서 출발하였지만 지금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당시에 누구에게나 이 은행얘기를 들려주면 사기꾼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암묵적인 합의(아니면 합리적 합의)에 의해서 그냥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뱅크런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전제조건하에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서 미국에 맡겨둔 금을 다시 찾겠다고 하니 한바탕 난리를 친 것도 기억할 것이다.
내가 맡겨둔 것을 찾는다고 하니.. 없다..
내가 맡겨둔 금이 없다.
금도 은행과 마찬가지로 10을 전당포에 맡기면 시장에 유통되는 것은 100이다.
여기저기에 금보유 증서를 써 주어서 허수의 금이 90이 존재하는 것이다.
실물로써의 금은 7~8정도 유통되고 나머지는 모두 증서로써 유통될 뿐이다.
이 상황에서 독일이 내 금 10개를 달라고 하니.. 있을리가 없다.

이전에 유시민씨가 나와서 가상화폐에 대해서 설전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나로써는 조금 동의하기 어려웠다.
튤립을 예로 들면서 튤립이라는 실체가 있었지만 가상화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지금의 자본 시장은 단지 트리거만 걸어주면 나머지는 실체와는 관계없다.
가상으로 돌아간다. 허수이다. 실물거래가 아닌 숫자만 왔다갔다할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가상화폐를 바라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최초의 트리거만 있으면 된다. 물레방아처럼 계속 끊임없이 외부에서 물이 공급되면서 돌아간다.
그런게 지금의 돈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가상화폐는 누군가에 의해서 트리거가 걸렸고 이미 지하세계의 검은돈으로 이미 많은 거래가 되고 있다.
이미 시장이 형성되었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가상화폐는 계속 유지될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비트코인은 배(실제지불금액)보다 배꼽(수수료)이 크다.
그래서 종국에는 비트코인은 폭락할까?
비트코인 자체만 보면 검증을 위한 채굴비용이 더 많이 들어감으로써 논리적으로 한계에 부딪혀서 신기루로 끝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비트코인에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른 우회로를 만들어 가치를 계속 유지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또한 가상화폐 거래 사이트가 주식처럼 사고 팔게끔 함으로써 이미 기술적인 부분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수많은 인원이 참여한 하나의 시장이 되었고 그것이 실체가 있든 없든 이미 가치를 부여하였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보면, 자본주의에서는 국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힘은 통화량 조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이 권리를 포기한다면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국가가 가상화폐를 발행할 수는 있지만 현재 통화되고 있는 가상화폐가 국가의 지위를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이것도 단지 예상이다.
인간에게는 돌발행동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른다이다.
아마도 현재의 가상화폐는 시장이 이미 형성되었기에 없어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추측된다.
경쟁 관계에 있다가 점차 몇개의 굵직한 가상화폐만 남기고 통합될 것이다.
그리고 그후에는 다른 금,은,구리와 같은 원자재처럼 하나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18년 어느날.. 가상화폐를 한번 생각해 보다.

어차피 일어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을 보며

주변에 누군가 로또 1등이 당첨되었다고 얘기를 듣게 되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쉬쉬해서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 주변의 누군가가 로또1등에 당첨되었다라는
소식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야.. 그 친구가 로또 1등 당첨되었다면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다.
신기하다. 내 주변에도 로또 1등 당첨되는 사람이 있다니..
그런데 조금 범위를 넓혀 보자.
전국으로 보면 로또 1등은 매주 1명도 아니고 여러명이 나온다.
5명이 나온다고 가정하고 이제 확률적으로 접근해 보자.
로또의 당첨 확률이 대략 1/8백만이고
내 지인이 로또를 사는 사람이 1000명이라고 가정하면,

한주에 5명이 나오니까
 5/8백만으로 숫자로 나오고 일년에 52주이므로
 5*52*1000/8백 = 30.769...

즉, 확률적으로 계산하면 30년이 지나면 내 주변에 반드시 로또 당첨자는 나오게 마련이다.
내가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극히 미비하지만 내 주변에 로또 당첨자는 내가 오래살게 되면
언제나 한번쯤은 만나게 되어 있다.
단지 1등임을 밝히지 않아서 못 만날 뿐이지.

사람들은 높은 확률에 대해서 의미 부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한걸음 물러서서 확률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들 교회내의 기독교 환자들을 보면 가끔씩 착각속에 살아가는 것 같다.
희박한 확률이 이루어지면 신의 뜻인냥...
신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관점에서 맞으면 그게 신의 뜻이다.
사업에서 성공했다고...
그렇게 어려운 확률을 뚫었다면 뭔가 신의 계시가 있다고..
그 어려운 확률속에 당첨된 택한(?) 자들이 간증을 하면 묘한 설득력을 갖추게 된다.
로또의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어려운 확률이지만
매주마다 몇 명의 당첨자는 거의 반드시 나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그래서 1등 당첨자의 말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난센스가 아닌가?

당신은 생산자입니까 소비자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가 부를 얻게 될까?
당연히 금융에 대해서 허수놀음을 하는 자가 부를 가지게 될 확률이 높다.
두번째는 누구일까?
생산수단을 가지는 자가 부를 얻게 된다.
초기 자본주의 생산수단은 생산설비를 말할 것이다.
생산설비를 가지고 물건을 찍어내고 그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버는 구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시대가 흘러 정보화 시대를 거치면서 생산수단은 바뀌게 된다.
정보, 즉 흔히 말하는 컨텐츠를 생산하는 자가 생산자이고 그것을 이용하는 자가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동일하게 생산활동을 하는 자는 돈을 벌고 소비자는 돈을 지불하는 구조이다.
이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생산자가 될려면 생산설비의 초기 투자금이 많이 들어가므로 진압장벽이 꽤 높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생산자가 된다. 물론 성공한 생산자이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나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생산해 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거의 전무하다.
산업화시대의 생산수단을 가질려고만 하고 정작 정보화시대에서는 소비만 한다.
시대가 변한 것을 느끼면서도 정작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내 자신.



코르나때 현장예배를 고수하는 교회를 보며

코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현장예배를 고수하는 많은 교회를 보게된다.
여기서 또 궁금증이 폭발한다.
그들은 뭐라고 하면서 현장예배를 주장할까?
크게 2가지 주장으로 압축되는 것 같다.

1)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예배이다.
그럼 당연히 예배의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도대체 예배라는 것은 무엇인지?
여기저기 검색해 보니 사전적 의미는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리는 것이
예배적 의미이고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 보면
진정한 예배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를 보게 된다.
진정한 예배의 정의는 대부분의 검색에서는 신령과 진정이란 단어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 행위를 위해서는 시공간을 뛰어넘음을 의미한다.
교회에서의 경배라고 규정하기 보다는 모든 공간에서 드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안에 가두어 좁은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창조주의 하나님을 선포하기에
굳이 교회안으로 한정하지 않고 민족을 뛰어넘은 예배를 의미한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대화에서도 예배의 장소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유대인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만을 고수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의 4장의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신념처럼 떠 받쳐던 예루살렘의 예배를 허물고 계신다.
장소가 그렇게 중요하다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이때"라는 시간에 초점을 두고
"신령과진정"이라는 자세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도 꼭 교회에서만 예배드려야 하는가?
다음을 가정하며 이런 자들에게 묻고 싶다.
전쟁중이라고 하자. 1000명의 무리와 함께 산길을 헤치며 피난길에 올랐다.
산턱 중간에 적들이 있기에 침묵을 유지하며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
피난중에 일요일 11시가 되었다. 피난민 중에 50명의 신실(?)한 크리스천이 있다.
일요일 11시이니 우리의 예식대로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려야겠다며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적들에게 들켜 나머지 950명도 같이 몰살당했다.
이런 극단적 예를 제시하였음에도 그 상황이라도 예배를 드리겠다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제로 많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이 상황에서도 예배를 드릴려고 할 것이다.
옆에 죄없는 나머지 950명이 죽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그런 예배를 기뻐할까?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기 위해서 50명이 목숨바쳐서 예배 드렸고
그 중에서 나머지 950명도 같이 목숨을 바치게 만든 그 예배..
그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인지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봤으면 한다.

2) 왜 교회만 문 닫아야 하는가?
이 주장을 하면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흔히 좌파세력의 기독교 죽이기이다.
공산주의 세력들이 득세하면서 유독 교회에 대해서만 바이러스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임시적으로 문을 닫게 한 후에 장기적인 계략으로 북한이나 중국처럼 모든 교회 문을 닫게 만든다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더 논의하기 위해서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먼저 필요하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고 교회 구성원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
교회 역할은 사랑을 하고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딱 2가지이다.
여러 책들에서 교회의 역할을 3가지로 혹은 10가지 나누어 설명하지만 2가지로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일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 그 예배에 관한 것은 첫번째 주제에서 논의하였기에 넘어가자.
두번째 이웃사랑의 관점에서만 보자.
백화점도 식당도 문열고 영업하는데 왜 우리만 닫아야 하나?
그 항변에는 영업적인 측면에서는 동의하지만 이웃사랑의 관점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교회는 장사하고 영업하는 곳이 아니고 대중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곳이다.
그리스도가 누군인지를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는 곳이다.
선교 초기에 왜 대중들은 그리스도를 주라 받아 들였을까?
논리적인 연결이 아니라 감성적인 연결이었다.
감성이 아니라 어쩌면 감동적인 연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지 모르겠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면 당황하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까?
왜 나에게 이런 혜택을 베푸는지..
그게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어찌 궁금하지 않으랴..
이런 교회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왜 우리만 문 닫아야 하는가라고 천박하게 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내의 집단 감염이 생기면..
교회 모든 사람들이 다 자살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웃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감동이 아니라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또 예배를 거론하지 말기를 바란다. 첫번째 주제에서 이미 논했기에..
교회는 백화점도 식당도 아니고 거대한 비지니스를 행하는 대기업도 아니다.
거저 섬기고 바보같이 퍼 주는 곳이다.
제발 교회가 피해자인냥 코스프레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다가 핍박받는 것은 핍박이 아니라 인과응보이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더 나아가 섬김의 자리까지 이르렀지만
예배만으로 미움을 받을때가 핍박일 것이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공감하기 어려운데 어느 누가 공감하랴?

보수 기독교 신문에서는 연일 코르나에도 왜 예배를 강행해야 하는지를 논설로 싣고 있다.
다소 현학적인 보이는 해석부터 짧은 주장까지..
마지막으로 변호인 영화에서 송강호의 이 대사가 떠 오른다.
"니는 니가 애국자 같나? 천만에 니는 죄없고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이다"
나에게 적용하자. 현상과 해석에 대한 통찰을 더 주의깊게 바라보자.
잘못된 신념으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났을때
애국자가 아니라 버러지의 삶을 살아왔다는 비극을 맞지 않기 위해서.

여자 약사의 동성애 강의를 듣고.

저희 교회에 여자 약사가 와서 동성애 강의를 했습니다.
듣고 정리만 해 두었다가 이제야 올리게 되네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주제이네요.

- 동성애 특강을 듣고 -
어제 동성애 강의를 듣고 우려스러운 점들이 있어서 글 올립니다.
저는 동성애자도 아니고 오히려 혐오스럽기도 한 입장입니다.
이런 글을 적는다는 것이 부담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서 적어 봅니다.

1) 기독교의 핵심원리인 사랑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강사가 동성애자를 만나서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할려고 한 흔적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나면 동성애를 혐오하게 되고,
 예방차원에서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있겠죠.
 하지만 그 중에 동성애자가 있고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가족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설교가 도움이 될까요?
 동성애가 아니라 창녀에 대해서 관점을 옮겨봅시다.
 죄됨을 강조하고 이슈화하면 과연 그 창녀가
 교회로 올 수 있을까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몸을 팔게 되었는지? 그도 이 일을 즐길까?
 현상만을 놓고 죄라고 단정짓고 강조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의 입장에서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선행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돈하는 설명.
 인과관계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설명하고 상관관계를 마치 인과관계처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강사왈 : "동성애를 받아들이면 교세가 확줄어든다. 선진국이 그렇다"라고
 했는데 교세가 줄어든 이유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질관이 바뀌어서 그럴 수도 있고 교회자체가 타락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할때는 근거와 검증의 자료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은 채 설명하는 것은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또한 동성애 다음에 수간이다?
 (물론 큰 맥락은 차별금지법이었지만..)
 그것 또한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명해야 하는데 그냥 전제조건처럼
 애기해 버렸습니다.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소세지를 먹었더니 배가 아팠다. 소세지는
 나쁘니까 먹지마라. 사실은 소세지에 핀 곰팜이가 원인이었는데
 단순히 소세지를 먹었더니 배가 아프니까 먹지마라???
 적어도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서 진짜 그런가를 되뇌이며
 검증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도 있어야 하는데...
 현상에 대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엮어서 설명해 버렸습니다.

3) 논리적인 비약이 심했습니다.
 예를 들면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면
 강사왈 : "회사원과 고등학생이 항문성교내용이 방송에 나와도 항의를 못한다"
 라고 들었는데 정말 그럴까요?
 동성애를 떠나서 현재 상식으로도 여고생과 회사원이 질삽입 성교내용이
 방송에 나와도 무방한가요?
 물론 강사가 동성애 대한 혐오를 표현하기 위해서 노골적인 하나의 예이겠죠.
 하고 싶은 말은 동성애 관련방송이 나올 것이다라는 맥락이지만 그 예가 적절하지
 않았기에 나도 노골적인 예로 대응했습니다.
 강사왈 : "선진국의 목사들이 차별금지법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라고 예를 들었는데
 그 비율이 얼마이며 제가 알고 있기로는 대부분의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상식선에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소당하는 것도 아주 심하게 인격적인
 모독을 했거나 아니면 동성애를 적극 옹호하는 사람 중 한명이 걸고 넘어졌거나
 그렇게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또한 미국 교계의 주류(쭉정이라고 표현하더군요)가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 주례를 반대한 목사는 잘려나갔다라고 표현하던데.. 그것도 제 상식 밖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알기로는 대부분 주류세력은 아직도 동성애에 대해서 이해는 하지만
 부정적인 입장이고 비주류 세력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옹호론자들입니다.

그냥 생각들을 막 적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적는 이유는 이런 기독교가 너무 싫습니다.
언젠가 천주교에 대해서 신랄하게 까는 설교을 듣었습니다.
그게 제가 아는 천주교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후 세월이 흘러 회사에서 천주교 신자와 얘기를 했는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너무 무식했더군요.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한데 기독교에 대해서 옹호하는 입장이고
동성애를 막아야 되겠다고 판단하면 너무나 무분별하게 정보를 아무 검증없이
살포해서 사회로부터 또 비난을 받습니다.

끝으로 제쪽에서 바라보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입니다.
모든 동성애에 대해서 죄라고 하기 보다는
나누어서 생각했으면 합니다.
성적타락에 의해서 동성애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말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근거는 동물들도 동성애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 동성애를 하면
화형을 시켰음에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지만 그 무언가는 있다라고 봐야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다르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동성애에 대해 어느 정도 포용하다 보면 성적자기결정권이니 동성결혼까지 이르게 되면서
정상적인 사람이었던 사람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므로 저도 우려가 됩니다.
그래도 어제와 같은 식의 강의는 더 위험하다란 생각에서 적어 보았습니다.

왜 낮은 음을 화음으로 연주하면 불편하게 들릴까?

C코드의 경우에는 도,미,솔이라는 3가지 음으로 구성된다. 피아노나 기타로 연주하면 전혀 불편함 없이 아름답게 들린다. 그런데 더블베이스(베이스기타)로 도,미,솔을 누르고 연주하면 뭔가 불협화음처럼 들린다. (피아노에서도 낮은 옥타브에서 C코드를 치면...